The Duke of Hermont’s Male Mistress
Chapter 22
비토르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최대한 덤덤히 말했다.
“로이 씨, 술 자주 먹여야겠네. 되게 솔직하고 귀여워지네요.”
“저 안 취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말 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어떤 말?”
“그렇게 자꾸 꼬시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요.”
로이의 눈빛이 대번 엄해졌다.
“아무한테나 예쁘다느니, 귀엽다느니. 그러니까 오해를 사는 겁니다. 소문도 괜히 이상하게 붙고.”
“아무한테나 한 건 아닌데요. 예쁜 사람한테만 예쁘다고 했고, 귀여운 사람한테만 귀엽다고 했지.”
뻔뻔히 대꾸하며 따라오는 지긋한 시선에 로이의 볼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안 그래도 술기운 탓에 달아올랐던 열기가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번졌다.
비토르는 눈앞의 예쁘장한 사냥터지기가 산딸기처럼 익어 가는 걸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건 로이 씨가 좀 인정을 합시다. 귀엽다니까.”
“……바람둥이.”
로이가 못마땅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그렇게 누구한테나 다정하게 대하시면서 정작 혼인은 왜 그리 완강히 거부하시는 거예요?”
“궁금한 게 많았네요. 평소엔 입 꾹 닫고 있더니.”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 그런 부류세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다는 건 진심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든 그 정도 행세는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선을 본 영애들에게 하나같이 똑같이 대하던 비토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적당한 웃음을 짓고, 적당한 예의를 지키며, 적당히 곤란한 얼굴로 마무리 짓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연극이 끝나면 오늘도 잘했다고 로이에게 적당한 칭찬을 건넸다.
다정하지만 진심은 없을 것 같은 사람.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지금까지 로이가 본 비토르였다.
“하하. 오히려 반대지. 전 사랑을 믿습니다.”
그런데 비토르가 의외의 말을 했다.
“사랑만큼 사람을 바꾸는 감정이 또 있을까요? 그 사람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까 봐 안달이 나고, 그 사람이 울면 내가 대신 울고 싶고, 아프면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고 싶고…….”
그의 시선이 유리잔을 넘어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했다. 마치 그리운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사랑 아닐까요?”
비토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낮고 조용한 어조였지만 그 안엔 낭만적이고 깊은 감정이 숨어 있었다.
“사랑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때론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너뜨리기도 하죠. 그러니까…… 믿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는 말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던 얼굴이 금세 웃음을 되찾으며 덧붙였다.
“로이 씨는 어떤가요?”
그러다 갑작스러운 화살이 로이에게 돌아왔다.
“저, 저요?”
“사랑을 숭배하는 쪽인가요?”
“숭배는 무슨…….”
“그럼 지루하다고 느끼는 쪽?”
로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아닌데……. 모르겠어요.”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로이는 사랑이 이렇다,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대개 행복해 보였다.
꼭 이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하퍼 아저씨에게 대입해 보는 게 맞겠지.
로이도 하퍼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가 고통스러워할 때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건 사랑이리라.
“두려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그가 사라졌을 때 로이도 그만큼 처절하게 무너질까.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가득한 채 들리지 않는 기침 소리.
더 이상 간호할 사람이 없어 건조하게 말라 버린 수건과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던 목소리의 부재.
그가 사라진 공간엔 쓸쓸함만이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겠지.
평범한 일상이 단숨에 폐허가 될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혹시 하퍼 씨를 생각하고 계신 거라면 로이 씨는 그렇게 겁낼 필요 없습니다. 무너지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느꼈는지 비토르가 격려하듯 말했다. 로이는 괜스레 말이 삐딱하게 나갔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그 사람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만 공작님의 사기에 가담한 게 올바른 방향은 아니죠. 누가 봐도 그냥 사기인데.”
“하하.“
솔직한 말에 비토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들키지 않게.”
그가 잔을 들어 올렸다. 로이는 마지못해 잔을 맞부딪혔다.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잔이 부딪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비토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들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로이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복도에 도착해 다른 사용인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곧장 문을 두드렸다. 대답 대신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렸다.
“잘 잤습니까?”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남자가 멀끔한 모습으로 맞이했다.
그런데 옷차림이 예상 밖이었다.
막 씻고 나온 듯 얇은 가운 차림에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비토르는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털며 무심하게 말했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아, 아니요. 씻고 계신 줄 몰랐어요……. 좀 있다가 다시 올게요.”
“그냥 들어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목이 잡혔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다시피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달칵 닫혔다.
“잠깐 앉아서 기다려요.”
“그러니까 밖에서 기다릴, 으악!”
로이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경악했다.
못볼 걸 봤다는듯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 고개를 홱 돌렸다.
비토르가 가운을 벗는 중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조밀하게 꽉 짜인 복근, 그 아래 뭔가 엄청난 걸 본 것 같은데.
‘무슨 여자 팔뚝만 한 구렁이가…….’
머릿속에 방금 본 장면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해졌다.
“왜, 왜 갑자기 벗으세요!”
“옷 갈아입으려고? 로이 씨야말로 왜 이렇게 놀라요. 이제 우리 형제 같은 사인데.”
“형제 같은 사이는 무슨…….”
목덜미까지 열이 확 올랐다.
로이는 벌을 서듯 뒤돌아 꼿꼿이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비토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형제가 싫으면 계속 애인 사이로 할까요?”
귓불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속삭이자, 로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내 못 참겠다는 듯 버럭 하며 그를 밀쳤다.
“아, 좀!”
맨살이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에 닿은 건 매끄러운 천이었다.
조심스레 눈을 떴다. 비토르가 양손을 머리 옆으로 올린 채 가볍게 웃고 있었다.
이미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하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자꾸 괴롭히고 싶어지네.”
“…….”
“어서 앉아요. 조식이나 같이 들자고 부른 거니까.”
비토르는 웃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응접실 테이블 위엔 정말로 두 사람 몫의 아침 식사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헤일리를 통해 공작이 로이를 찾는다고 했을 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더니. 고작 식사를 같이하자고 부른 것인가.
작게 한숨을 내쉰 로이가 비토르를 흘겨봤다.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챈 그가 재빨리 로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잔소리는 먹으면서 해.”
“저희 저택에서는 거리 두자고 하지 않았었나요?”
“생각해 보니까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아서.”
“왜요?”
“내가 노예 노릇하답시고 로이 씨 졸졸 따라다닌 거 저택 모든 사람이 아는데, 갑자기 데면데면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내기였고……. 잠깐이었잖습니까.”
“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뭐든 과하게 행동하면 위화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같은 방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해 죽겠는 로이의 마음은 모르고, 비토르가 느긋한 표정으로 커피 향을 음미했다.
“그래도 갑자기 방에 누가 들어오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이른 아침에 저를…….”
“이 시간에 누가 내 방에 찾아와. 애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데.”
“그러니까 저택에선 그런 말 좀…….”
헤르몬트 공작의 남자 정부
